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잠성 전투 (문단 편집) === 2차 공방전 === 한편 [[진평왕]]은 이 전투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전사한 찬덕의 아들 '''[[해론]]'''을 20세의 나이에 [[나마|대나마]]로 임명하고[* 신라의 경우에는 [[국가유공자]]를 우대하는 정책 중 하나로 전쟁터에 국가를 위해 용맹하게 싸우다 죽은 전사의 아들들에게 벼슬을 주었다. 대표적으로 [[소나]], [[야이차]] 등이 있다.] 618년에는 금산당주(金山幢主)로 임명했다. 그리고 618년에 북한산주(北漢山州)[* 현재의 [[경기도]] 일대로 주 성은 [[남한산성]]의 모태로 추정되는 과잠성으로 보여진다.(이기동, 2005)]의 변품(邊品)이 가잠성을 되찾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을때 [[해론]]도 동참했다. 해론의 참전에는 아버지 찬덕을 죽인 백제에 대한 복수심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. 변품이 이끄는 신라군의 남하 소식에 [[백제]]도 병력을 모아 신라군의 진격로로 진군했다. 그리고 양 측의 군대가 격돌하게 되었고, 해론은 장수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고 칼을 쥔 채 전장으로 뛰어들었다. >“예전에 내 아버지께서 여기서 숨을 거두셨는데, 나도 지금 여기서 백제인과 싸우게 되었으니 오늘이 내가 죽을 날이다.” > 昔吾父殞身於此 我今亦與百濟人戰於此 是我死日也. >---- >'''《[[삼국사기]]》 [[http://terms.naver.com/entry.nhn?docId=1642888&ref=y&cid=49628&categoryId=49628|제47권 <열전> 제7 -해론]]-''' 적진으로 뛰어들어간 해론은 백제군 여럿을 쳐죽이며 아버지 찬덕과 같은 용맹함을 과시했으나 결국 백제군에게 둘러싸여 전사하고 말았다. 해론의 용맹함에 힘입어 [[신라]]는 다시 가잠성을 되찾는데 성공하게 되었고, [[진평왕]]은 해론의 죽음에 몹시 슬퍼하며 그의 가족들을 보살피라는 명을 내렸다. 신라인들도 해론의 죽음에 슬퍼하며 장가(長歌)[* 장편으로 된 노래, 혹은 길이가 자유로운 시가 문학을 말한다. (출처:위키피디아)]를 지어 그를 기렸다고 한다. >40년(서기 618), 북한산주의 군주 변품(邊品)이 가잠성을 되찾고자 병사를 일으켜 백제와 싸웠다. 해론(奚論)이 종군하여 적과 마주쳐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죽었다. 해론은 찬덕의 아들이다. >四十年 北漢山州軍主邊品 謀復椵岑城 發兵與百濟戰 奚論從軍赴敵力戰 死之 論 讚德之子也 >---- >'''《삼국사기》 [[http://terms.naver.com/entry.nhn?docId=1642690&cid=49625&categoryId=49798|제4권 <신라본기> 제4 -진평왕]]-''' ---- >19년(서기 618), 신라의 장군 변품(邊品) 등이 와서 가잠성을 공격하여 성을 다시 빼앗아갔다. 이때 해론(奚論)이 전사하였다. >十九年 新羅將軍邊品等 來攻椵岑城 復之 奚論戰死 >---- >'''《삼국사기》 [[http://terms.naver.com/entry.nhn?docId=1642690&cid=49625&categoryId=49798|제27권 <백제본기> 제5 -무왕]]-'''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